와인, 익을수록 아름답다

세월이 빚어낸 숙성의 마법

On April 20, 2018



 

‘와인은 오래될수록 좋은 것’이라는 신화를 사람들은 갖고 있다. 그러나 오래 숙성할수록 맛있는 와인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두면 맛이 없어지는 와인이 더 많다.

와인이 숙성한다는 것은 어떤 과정이며, 어떤 와인이 잘 숙성할 수 있을까?
 

와인은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아서 코르크 마개로 봉한 병 속에서도 미세하게 산화하면서 성장하여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거쳐 죽음에 이르는데 이 과정을 숙성(aging)이라고 한다. 모든 생명체가 청년기에 가장 아름답고 중년기에 무르익어 성숙하듯이, 와인도 가장 맛있는 시기가 있으며 그 시기를 지나면 노쇠해가다가 결국 식초로 변해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마다 노화 속도가 다르듯이 와인도 품종에 따라 숙성 연한에 큰 차이가 있다. 일단 오랜 숙성을 견디려면 그 세월을 버틸 힘과 저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벼운 화이트 와인보다는 무겁고 진한 레드 와인이 숙성에 적합하다. 즉 태닌, 산도, 당도가 풍부하고 균형 잡힌 와인일수록 더 오래 잘 익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태닌이다. 자연 방부제 역할을 하는 태닌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와인의 진한 색과 떫고 거친 맛을 조금씩 끌어안으면서 와인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오래된 와인에서 나오는 침전물이 바로 태닌으로, 처음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것이 거친 성분들을 하나둘 몸에 붙이면서 입자가 점점 커진 것이다.
 

화이트 와인은 태닌이 전혀 없기 때문에 숙성하기 힘들다. 그러나 화이트와인 중에서도 무거운 샤도네, 당도 높은 디저트 와인은 오래 숙성할 수 있고, 레드와인 중에서도 태닌이 거의 없는 가메이나 피노 누아는 우수한 품질이 아니고는 오래 견디지 못한다. 

태닌이 많은 대표적 품종은 카버네 소비뇽으로, 오랜 숙성이 가능한 와인은 대부분 카버네 블렌드의 레드 와인들이다. 특히 보르도 레드 와인의 경우 적어도 10년이 지난 후에 마셔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으며, 질 좋은 와인은 수십년을 견딜 만큼 숙성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러면 숙성한 와인은 어떻게 달라질까? 와인의 맛과 향, 색과 질감이 다 변하게 된다. 색깔은 레드 와인의 경우 점점 더 옅어져서 나중에는 투명한 호박색(amber)이 되고, 반대로 화이트 와인은 점점 더 짙어져서 진한 황금빛을 띠게 된다. 향은 훨씬 복합적인 부케를 갖게 되고, 맛은 부드럽고 섬세해진다. 발랄하고 거칠던 맛이 순화되어 점잖고 조용한 맛, 여러 맛을 켜켜이 감추고 둥그렇게 조화된 맛이다.
 

젊은 와인의 강렬한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숙성하여 착 가라앉은 와인의 맛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심심하다거나, 별로 맛이 없다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요즘 와인을 많이들 마시고 있지만 오래된 와인을 맛볼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숙성된 맛이 어떤지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미국을 비롯한 신세계 국가들의 와인 역사가 짧은 탓이다.

한편으론 이 세상에 나오는 대부분의 와인, 일상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저가의 와인들은 사서 금방 마시라고 출시되는 것이니, 괜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좋은 와인이 잘 숙성된 맛을 즐기고 싶다면 품질이 보증된 레드 와인을 여러병 구입해 잘 보관해두었다가 5~10년쯤 후에 마셔보기를 권한다. 특별히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때 이런 와인을 꺼내 마신다면 무척이나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몇백달러짜리 값비싼 와인이 아니라도 30~50달러 이상의 카버네 블렌드라면 몇 년만 두어도 훨씬 부드럽고 우아해진 맛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와인과 함께 나이 먹어가면서 세월의 조화에 넉넉히 관대하고 관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와인의 진정한 매력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글 :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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