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씁쓸한 퇴장

한국의 초창기 야구는 일본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하기 전 실업야구에는 많은 재일동포 출신들이 활약했다. 국내 야구계가 걸음마 단계에서 이들은 화려한 선진야구를 선보였다. 1970년대 고교야구가 한창 주가를 높였을 무렵 라디오 방송국은 전 경기를 중계했다. 

당시 이름을 날린 대부분의 해설자들이 부산 마산 출신들이었다. 한전 감독을 역임한 김계현, 프로야구 산파역 이호헌 등은 마산상고(현 용마고) 출신이다. 김계현은 야구 최고 이론가로 꼽혔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감독 어우홍은 부산 동래고 출신이다. 그 뒤를 김소식(부산고), 허구연(경남고) 등이 이었다. 투박하고 강한 사투리에도 불구하고 부산 마산 출신 해설자들이 유난히 많이 배출된 이유도  일본의 선진야구를 책과 라디오, TV를 통해 남들보다 먼저 터득했기 때문이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부산 마산 지역에서는 위성안테나를 달면 일본 방송을 여과없이 시청할 수 있었다. 올드팬들이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보다 ‘교진(거인군)’에 더 익숙한 것도 방송의 영향이었다. 

한국 스포츠에서 최초의 외국 진출 선수는 백인천(74)이다. 축구의 외국 진출 1호 차범근(65)은 1979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 포수 백인천은 초고교급 선수였다. 경동고를 졸업하고 농업은행을 다닌 백인천은 한일국교정상화(1965년)가 이뤄지기 전인 1962년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콧카이도 니폰햄 파이터스)에 입단했다. 병역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으나 국가 차원에서 일본 진출의 길을 허용했다. 

1975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차지한 백인천은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한국으로 영구귀국했다. 프로원년 MBC 청룡의 플레잉 매니저로 활약하며 타율 0.412를 기록했다. 앞으로 누구도 넘을 수 없는 타격 기록이다. 그만큼 수준 차이가 컸다. 

백인천 이후 일본 프로야구에 발을 디딘 선수가 투수 선동열(55)이다. 광주일고-고려대를 졸업했다. 고려대학 시절 일화 한 토막. 고려대학 야구부에서 작고한 최남수 감독에게 매 맞지 않고 활동한 3명 가운데 한 명이다. 때렸다가는 자칫 사보타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고교급 투수로 통했던 부산고의 박동희(작고)도 맞지 않고 선수 생활을 했다. 

고려대를 졸업한 선동열은 몸값 줄다리기로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을 우회했다. 1985년 우여곡절끝에 고향팀 해태(현 기아)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당시 최고 금액을 받았다. KBO 리그에서 11년을 활동한 선동열은 5시즌이나 방어율 0점대를 작성했다. 통산 방어율이 1.20으로 언터치어블이었다. 투구폼이 비행기 착륙을 연상케한다고 해서 ‘무등산 폭격기’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역대 최고 투수다.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과의 명승부는 지금도 회자된다.  

KBO 리그에서 모든 것을 이룬 선동열은 미디어와 팬들의 지원사격을 받아 1995시즌을 마치고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재정이 취약한 해태는 선동열과 2년 후 유격수 이종범마저 주니치로 팔았다. 나중에는 구단도 매각했다. 이종범은 일본 프로야구 적응에 실패했다. 주니치의 마무리를 맡은 선동열은 첫 해 고전했다. KBO 리그에서는 발각되지 않았던 위투 동작이 일본 심판들에게는 모두 보크로 판정됐다. 2군으로 추락하는 수모도 맛봤다. 첫 해 방어율이 5.50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국보급 투수 위력을 발휘하면서 이름 선(sun)을 빗대 ‘나고야의 태양’으로 우뚝섰다. 

선동열은 독불장군에 개성이 강한 해태 김응용, 주니치 호시노 센인치 두 감독 밑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훗날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둘에게 받은 영향이 부정적인 면으로 작용했다. 삼성 라이언스 감독으로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제패했지만 초호화 멤버들로 이룬 성과로 폄하돼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10년 삼성에서 해고된 뒤 2012년 친정 기아 감독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선수들과의 소통 부재로 한계를 드러내 2014시즌을 마치고 구단은 재계약을 제시했지만 팬들의 비난에 스스로 그만뒀다. 

이후 전임 KBO 구본능 총재가 야구대표팀의 전임감독으로 발탁해 복귀했다. 개인적으로 장기레이스에서는 감독 부적합 판정을 받았지만 단기전의 국가 대표 감독으로는 최적이라고 판단됐다. 선동열은 순간 판단이 뛰어나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다. 하지만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금메달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선발과정이 투명하지 않았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 문제는 결국 국회 국정조사로 불거져 증인으로 채택되는 수모를 겪었다. 

스포츠에 비전문적인 국회의원들의 수준낮은 질문에 국보 투수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 식구인 KBO 정운찬 총재마저 선 감독을 감싸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가했다. 경제학자 정운찬 총재는 구정조사를 통해 리더십 부재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선동열은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14일 전임감독에서 사임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한 몸짓이었다. 야구의 영웅을 한 순간에 뭉개는 퐁토가 아쉬울 뿐이다. 


글 : 글 문상열 라디오서울 스포츠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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