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관광’ 박평식 대표

“나와서 친구 만드세요,

집에서 웃을 일 뭐 있습니까.”

On July 27, 2018


그의 사무실에서.

 

‘아주관광’ 박평식(65) 대표는 LA한인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열 명을 꼽으라면 그 안에 들 법한 사람이다.

84년 창업해 34년째 여행사를 이끌어오면서 직접 가이드도 하거니와, TV와 라디오, 신문 등 모든 매체에 나가는 회사 광고에 직접 출연하거나 본인 사진을 넣어 마케팅하기 때문이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로 유명한 그의 멘트는 특유의 경남 남해 억양까지 더해져, 3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곳 한인들에게 기억돼왔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마케팅의 수단으로 삼는 그의 적극성 덕분에 아주관광은 미주 LA 한인사회와 고락을 같이 하면서 대표적인 여행사 중 하나로 성장했다. 생업에 쫓겨 여행은 사치에 불과했던 70-80년대 이민 1세들의 경제력이 탄탄해지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 여행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아주관광은 어찌보면 그들의 발이 되어 또 다른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시켜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게에도 부침은 있었다. 2002년 9월, IRS 직원 50여명이 불시에 들이닥쳐 회사가 ‘탈탈 털리는’ 경험을 한 것이다. 아주관광의 인지도만큼이나 당시 한인사회에 워낙 어마어마한 사건이어서, 연일 한인 언론에 오르내리는 ‘유명세’(?)도 톡톡히 치렀다. 박 대표는 이번 인터뷰에서 당시의 체험을 “하루 아침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내 생애 가장 큰 타격”이라고 표현했다.
 
32세이던 84년 달랑 셰볼레 세단 하나와 건강한 몸을 밑천삼아 아주관광을 창업한 박 대표. 의기충천했던 32세의 젊은 사장은 이제 65세의 중노년이 됐지만, 여전히 평균 월 1회 여행을 직접 가이드하며 체력과 열정을 과시하고 있다. 34년전 푸릇푸릇했던 그의 추억을 따라, 함께 가보실까요.


90년 5월 처음 리무진 타고 라스베가스 갈 때.
 

셰볼레 세단 하나 믿고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31세에 미국 웨스턴 켄터키 대학으로 늦깎이 유학을 온 남해 청년은, 농업경영학 석사 과정을 하다보니 막막했다. 1년 지원을 약속받은 로타리클럽 장학금이 끊기면 자력으로 먹고 살아야하기에, 석사 학위를 따기보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론내렸다.

LA에 와서 신분 유지를 위해 교육학 석사 과정을 등록하고, 84년 셰볼레 세단 하나를 가지고 택시관광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주관광의 태동이었다.

“제가 갖고있던 차에 한국서 온 손님 2-3명을 태우고 디즈니랜드 등 LA 구석구석을 관광시키는 것부터 시작했지요. 베벌리힐스를 가야하는데, 당시엔 GPS도 없어서 베벌리 블러버드를 따라 무조건 서쪽으로 갔어요. 베벌리힐스의 대저택들을 보여주면서 나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애썼는데, 지금 생각하면 민망하기 이를 데 없죠. (웃음) 그 손님들 모시고 다시 투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네요.”

이민 1세들의 고생담이 그렇듯, 그의 젊은 날도 생업과 공부, 육아에 치이는 나날들이었다. 그는 교육학 석사 수업에, 그의 아내는 웨이트리스 일을 가야할 때면, 그가 어린 두 자녀를 학교에 데리고 가 마당에서 네 살배기 첫째 아들에게 동생을 데리고 놀게 했다고. 그 자녀 둘이 자라서 이제 38세, 34세가 됐다.

 

“셀폰도 없던 시절인데 택시관광회사를 하려니 집전화번호를 손님에게 줬어요. 손님이 집에 전화하면 네 살짜리 아들이 받아서 손님의 전화번호를 받아적었는데, 어린 애가 잘못 적다가 손님에게 혼나기도 했나봐요. 나중엔 아들이 전화를 아예 안 받으려고 하더라고요.”


32년전 처음 그랜드캐년 가족나들이.
 

여행상품 개척자

당시 택시 한 건 다녀오면 5달러를 벌었는데, 햄버거 몇 개를 사먹을 수 있었다. 공항 한 번 다녀오면 25달러였으니 네 번 다녀오면 100달러. 당시 100달러면 지금 가치로 1,000달러에 가까운 큰 돈으로 느껴졌다고.

그가 창업할 당시 아리랑, 신진, 한진 등 다른 택시 회사들이 많았는데, 아주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유는 그가 ‘패키지’라는 체계적인 여행상품을 개발했기 때문.

90년 무렵까진 옐로우스톤 관광을 가려면 가는 데만 버스로 3일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비행기로 솔트 레이크 시티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버스로 이동하는 상품을 박 대표가 개발했다고.

“90년대 초는 관광업계의 춘추전국시대였어요. 당시 매일 관광, 호돌이 관광 등 다른 관광사들도 있었지만 이 상품의 인기로 아주관광이 크게 떴지요. 92년 4.29 폭동 직후엔 실의에 빠진 한인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당시 249달러이던 2박 3일 그랜드캐년 상품을 79달러만 받고 판매했어요. 한인들이 1년 365일 쉬지도 못하고 리커나 마켓을 운영해왔는데 폭동으로 일터가 망가졌으니까요. 이대로 무너지지 말자는 독려의 의미였지요.”

 

천당과 지옥을 오가다

‘88올림픽’ 이후 한국에서 미국 여행 붐이 불면서, 아주관광은 하루 5-10대씩 버스를 운행할 정도로 전성기를 맞았다. 97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 타격으로 여행객이 뚝 끊겨 관광업계가 흔들려도, 아주관광은 오히려 미주 한인 관광시장의 85%를 점령할 만큼 ‘끗발’ 날렸다고.

호사다마였을까. 90년대 말 남부러울 것 없이 잘 나가던 회사는 2002년 갑자기 들이닥친 IRS의 세무감사로 인해 그의 표현대로 “지옥으로 떨어졌다.”

“완전히 죽는거죠. ‘아주관광이 망한다’는 말이 떠돌았고요. 저와 가족의 인생을 바꾼 일이었어요. 당시 아들이 워싱턴 D.C.에서 대학졸업하고 7차 인터뷰까지 가면서 미국 재정경제부 공무원 합격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 사건 터지고나서 제 딸이 ‘집이 풍비박산났다’고 전화를 했나봐요. 아들이 다 때려치고 LA로 와서 세금 전문 변호사 된다고 로스쿨에 진학해서, 결국 서른 무렵에 변호사가 됐어요. 그 때 아들이, ‘아빠 엄마가 목숨 걸고 지켜낸 사업인데 내가 지켜줄게요. 걱정 마세요’라고 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2007년 모든 IRS 문제가 해결됐고 이제 10여년이 지났다.


오래 전 회사 직원들과 소풍.

 

“이제는 저 스스로 즐깁니다”

65세인 그는 지금도 평균 월 1회씩 직접 가이드를 나간다. 6월엔 노르웨이와 덴마크, 러시아 등 12박13일 코스, 가을엔 남부 프랑스와 발칸 유럽, 11월엔 남태평양, 2월엔 아프리카 등지까지 섭렵한다. 게다가 매년 1개씩 새 상품을 발굴하고, 첫 상품은 꼭 아내 헬렌 박씨와 함께 간다.

“다리 떨리기 전에, 가슴이 떨릴 때 인생을 즐기자”가 모토인 그가 여행업 34주년을 맞는 소회는 뭘까.

“용감하고 정말 고생 많이한 아내에게 고마움 전합니다. 어쩌다가 시작한 여행사업이고 처음엔 즐길 정신도 없었는데, 이제는 진짜 제 스스로가 즐겨요. 그리고 누군가에겐 인생에서 단 한번의 여행이 될 수도 있기에, 저는 손님들 웃기려고 준비를 합니다. ‘박 사장, 내가 10년 전에만 이 재미를 알았더라면’ 하시는 분들 많이 봤습니다. 나와서 친구 만드세요, 집에 있으면 웃을 일 뭐 있습니까. 하하.”



‘아주관광’ 전화 : (213)388-4000

주소 : 833 S. Western Ave., LA.

글 : 김수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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