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노명우(저자) | 사계절

이 책은 사회학자인 아들이 대신 쓰는 부모의 자서전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고 해석해야 할 사회학자가 왜 가장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이야기인 부모의 삶을 꺼내든 것일까? 전작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보여주었듯 사회학자 노명우는 한 개인이 세속을 살아가며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문제들,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고통과 분노의 순간들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끌어올리는 것에서 사회학의 존재 의의를 찾는다.

개인이 맞닥뜨리는 삶의 고비들을 ‘운이 없어서’, ‘가진 게 없어서’, ‘팔자를 잘못 타고나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서 설명하는 것, 그래서 그 개인들에게 자기 삶을 설명할 언어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학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떠난 부모의 삶을 기록하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려는 아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부모와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언어를 제공하는 사회학적 탐구의 여정이 되었다.

저자는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못한 부모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1920~70년대 한국 대중영화를 소재로 삼았다. 보통학교 졸업이 배움의 전부였던 아버지, 그마저도 마치지 못한 어머니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책이나 신문이 아니라 떠도는 소문이나 영화 구경을 통해 알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특별히 배움이 짧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는 텍스트의 세계에 모여 있는 사람보다 영화관에 모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대중교육이 부재했던 시절 영화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접할 수 있는 대중 미디어였다. 사람들은 영화관 안에서 관객이라는 지위를 공유하며 모든 차이를 내려놓고 ‘동시대인’의 감각을 배웠다.

1924년생 아버지, 1936년생 어머니의 삶에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세대가 공유한 사회적 운명이 새겨져 있다.

아버지는 식민치하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붐을 타고 만주로 향했고, 강제 징용의 대열을 따라 나고야의 조토헤이(상병)가 되기도 했다. 전쟁 이후에는 많은 이들이 그랬듯 달러가 모이는 곳, 즉 미군기지 근처에 정착해 가족을 재건했고, 아내에게는 전혀 살갑지 않지만 밖에서는 돈 잘 쓰는 호탕한 남자 행세를 하며 제법 윤택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역사가 특별히 기록할 리 없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다.

한편 어머니는 가난한 집 막내딸로 태어나 국민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전쟁 통에 고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아버지와 결혼해 파주 미군기지 근처로 이주했고, 미장원을 열어 양공주들의 머리를 말았지만 그들과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늘 한복을 입었다. 남편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해가며 웃음기 없는 삶을 살던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자식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것이었다.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던 어머니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전형적인 ‘한국 여자’였다.

이 책의 백미는 저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정착한 파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1950~70년대의 세상물정 풍경이다. 전후 미군 부대가 주둔했던 파주에는 달러를 벌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뿌리 뽑힌 인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다. 두 미군 부대를 잇는 삼거리에 사진관을 열어 달러를 쓸어 담은 아버지는 그 돈으로 미군의 유흥 공간인 ‘레인보우 클럽’을 열었고, 어머니는 그 바로 옆에서 양공주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미장원을 운영했다. 미군 부대가 철수하고 그 자리에 한국군이 들어오면서 파주는 한국군의 배후 마을로 변신한다. 레인보우 클럽과 미장원도 군인과 면회객을 상대하는 무지개 홀과 무지개 다방으로 모습을 바꾼다.

저자는 자신의 고향이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퇴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한 사람의 삶이 공간과 상호작용하며 빚어내는 역동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송명국, 알라딘 로데오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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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송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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